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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인잡-허균에 대한 인물 이야기, 그리고 그에 대한 상상

by 업글에이더 2022.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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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의 내용을 캡처했습니다. 가장 하단에 원본 영상이 있습니다.

다양한 서류 양식에 예시로 항상 등장하는 이름이 있습니다. '홍길동'

왜 여러 이름 중에서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을까요?

 아마 그 이름이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이름이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무엇이 흥미롭다고 하는것일까요?

일단은 과연 허균의 홍길동전은 정말 허균이 만든 이야기일까요?

허균은 동인의 대장인 허엽을 아버지로 두고, 큰 형 허성의 경우는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누나 허난설헌 역시 당시 조선시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것 으로 미루어 보아 홍길동처럼 가난하거나 신분이 낮은 집안의 출신도 아니었으며 서자 출신은 더욱 아니었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정말 뼈대있는 집안의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허균은 어떻게 홍길동전이라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을까요?

아마 어린시절 아버지 허엽이 허균에게 붙여준 글 선생이 아무래도 모티브가 아닐까 유추됩니다.

당시 허균에게 글을 가르쳐준 그의 스승은 허균의 관점에서 매우 똑똑하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벼슬을 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신분제도에 대한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허균은 서자들과 가까이 지내고 기생을 비롯하여 신분에 상관없이 사람을 사귀었으며, 당시 시대적 분위기가 불교를 천대하던 유교국가였음에도 원효대사를 비롯하여 당대 스님들과의 친분도 두터웠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허균은 집안이 좋고 인물 또한 총명하고 똑똑하여 황해도 도사로 지방 관리를 감찰하는 직책의 벼슬도 받게 되지만 벼슬을 한 뒤에도 서자를 비롯하여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게 되어 좋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되고 이후 파직당하기 까지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허균이 당시 지배층에서 완전하게 버림받지 않게 된 이유는 바로 허균의 뛰어난 역량에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보통 문인들로 구성된 사신을 조선으로 보냈었는데, 허균의 경우 당대의 유명한 조선의 좋은 시를 사신들에게 막힘 없이 소개할 수 있었으며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사람으로 중국 사신들에게 인기가 많았기에 사신을 대하기에 허균을 능가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한 나라의 사신이라 낮게 생각 할 수 있으나, 선조와 광해군은 모두 후궁의 자식들로 정통성의 부족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중국과의 관계를 중요시 여겼었는데, 이러한 중국과의 관계를 이어가는데 허균은 시와 풍류를 아는 맞춤형 인물이었으며 때문에 그의 자유분방함이 걸림이 되었음에도 놓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군요.

 

계급사회에 대한 불만을 비롯하여 정의롭다 생각할 수 있는 허균이지만 그와 다른 면모 또한 있었습니다.

광해군이 왕이던 시절에 동생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계속하여 견제하고 있었는데 허균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는 선조와 광해군을 욕하는 책이 팔리고 있으며 이를 본인이 모두 적발하여 책을 수거하고 파기했다고 보고 하였으며 이러한 내용을 알게 된 광해군은 매우 기뻐하며 허균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사건에 대하여 이후 조선왕조 실록에는 허균 본인이 광해군과 선조를 흉보는 책을 만들고 본인이 처분한, 왕을 속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의 폐비하는 방법을 계획하면서 사람을 고용하고 상소를 작성하도록 지시하여 인위적으로 여론을 자신의 의도로 몰아가려는 행동을 했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신분과 관계 없이 사람을 사귀고 관직에 있으며 자유로웠던 허균에 대한 이야기는 홍길동전의 정의로움을 생각한다면 예상과 너무 다른 모습도 많이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홍길동전은 어쩌면 여론을 선동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글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읽고 생각할 수 있어야 했으니 한글로 작성했을 것이지요.

 

홍길동전은 임진왜란 이후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한글 사용이 대중화되었던 이유 중 하나가 임진왜란 당시 한문으로 된 서한문은 한문을 해석할 수 있었던 일본군에 의해서 보안이 약할 수 있었으나 한글은 일본군이 읽지 못하는 중요한 암호문으로 사용될 수 있었기에 한글 사용이 대중화될 수 있었던 계기였다고 합니다. 또한, 한글 사용을 통해서 민족의 정체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고 하네요.

 

이후, 허균은 광해군 때 영창대군을 옹립한 혐의로 역모에 가담했다며 능지처참을 당했다고 하는데요, 광해군은 앞에서도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서 허균을 잡았어야 했다는 말이 있었지요?

게다가 허균과 같이 광해군 또한 백성을 위한 정치로 허균과 마음이 맞았으리라 생각할 수 있는데요, 이를 보고 허균의 능지처참은 광해군의 의지보다 다른 신하들의 의지가 더욱 반영되어 그런 것이 아닐까 라는 유추도 있다고 합니다.

 

이후 이야기는 허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허균이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모습과 풍류를 즐기는 모습 등 다양한 면모를 바탕으로 인물에 대한 분석을 작가와 과학자 그리고 영화감독의 관점으로 저마다 분석하여 이야기 나누었는데 이는 영상으로 확인하시는 게 더 재미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저는 김영하 작가님이 이야기했었던 허균의 다양한 캐릭터를 허균과 홍길동이라는 서로 다른 두 인물이 하나로 표현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셜록과 왓슨을 비롯하여 서로 다른 두 인물이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물들의 이야기가 생각났었습니다.

 

상세한 이야기는 영상을 통해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더욱 상세한 내용은 아래 영상을 보시면 되겠습니다.

 

영상의 내용에 추가된 디테일이 정리된 글이 있어서 함께 링크했습니다. 내용이 길어서 시간 되실 때 보시면 되겠습니다.

 

‘홍길동전’ 저자 허균은 왜 능지처참을 당했나 - 직썰

▲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 하평마을, 교산 언덕에 세워진 허균 시비. 한시 ‘누실명’이 새겨져 있다.399년 전 오늘, 허균 능지처참형에 처해지다▲ 허균·허난설헌기념공원 안에 봉안된 허균

www.ziks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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